가장 평범한 지옥, 가족 <케빈에 대하여>와 <마더>
- Frenzi
- Aug 15, 2018
- 4 min read
심리 스릴러와 결부되었을 때 가장 매력적인 소재는?
개인적으로, 심리적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핵심 재료는 ‘낯섦’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한 번도 보지 못한 것, 위협이 될 것만 같은 무언가를 봤을 때 우리는 불안하고, 긴장한다. 낯설다는 건 뭘까. 학구적으로 파고들 수도 있겠지만, 사전적으로 얘기해보자면 익숙함의 반대말이다. 그렇기에 낯섦은 익숙함 사이에 끼어있을 때 더욱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법이다. 마치 새하얀 종이 위의 검은 얼룩과 같은 또렷한 존재감, 그 대비를 가장 잘 드러내 줄 소재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곳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가장 효과적으로 ‘무서울’ 수 있는 영화적 배경은 다름 아닌 가족이라고 생각한다. 누구에게나 있고 더없이 익숙한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위협으로 다가올 때, 그 울타리는 마치 폐쇄된 공간이 우리에게 공포감을 주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우리를 옥죄어 온다. 이번 호 영화 리뷰에선 이렇게 가족이라는 소재를 흥미롭게 뒤틀어 소름 끼치는 스릴러를 선보이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품 두 편을 소개하려고 한다. 필자 스스로가 (소위 ‘갑툭튀’로 불리는) 점프스케어(jumpscare)나 고어한 장면에 취약하기에, 이번 글에서 소개할 영화는 전통적인 의미의 공포 장르와는 거리가 있는 작품들이다. 그러나 순수한 심리적 긴장만으로 간담이 서늘해지는, 어쩌면 강렬한 트라우마를 선사할 경험이 되리라 보증한다.
케빈에 대하여
첫 번째 영화는 린 램지 감독의 2011년 작 <케빈에 대하여>다. 어떤 사건을 저질러 수감되어있는 아들 케빈(에즈라 밀러)에게 엄마 에바(틸다 스윈튼)가 면회를 가는 현재와, 그들을 비극으로 이끈 케빈의 출생부터의 과거를 교차시키며 이야기는 진행된다. 틸다 스윈튼과 에즈라 밀러가 펼치는 연기만으로도 충분히 압도적이었을 이 영화는, 정교하게 짜여진 미술로 작품성을 한 층 더한다. 대사 한 마디, 극적 상황 하나 없이 순전히 이미지만으로 구축된 영화의 오프닝 장면은 특히 일품이다. 열려있는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휘날리는 흰 커튼, 쉴새없이 돌아가는 스프링클러 소리,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새빨갛게 물든 토마토 축제 현장. 언뜻 무관해 보이는 이미지들의 나열은 종반에 드러 참극과 연결되었을 때 비로소 충격으로 다가온다.


스릴러는 기본적으로 거대한 폭탄 더미를 숨겨둔 뒤 타들어 가는 도화선을 지켜보게 하는 장르이다. 언제든 터질지 모른다는 그 긴장감을 끝까지 갖고 가는 것이 열쇠인데, <케빈의 대하여>는 거의 모든 장면에서 건조한 톤을 유지하면서도 그 아래에서 끓고 있는 기괴한 에너지를 자꾸만 상기시킨다. 대표적으로, 케빈의 동생 실리아가 한쪽 눈을 잃는 장면이 있다. 에바는 케빈이 고의로 그런 일을 꾸몄다는 의심을 품고 있는데, 이 상황에서 케빈이 식탁에 올라온 리치를 게걸스럽게 씹어대는 씬은 영화의 가장 소름 돋는 장면 중 하나이다. 이 외에도 영화는 간접적인 화술로 관객의 불안감을 증폭시키는 솜씨가 능숙하다. 이 영화에서의 ‘폭탄’이 터지는 순간은, 케빈이 구속됐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 케빈이 진정한 괴물로 변해 어떤 사건을 저지르는 순간이다. 그 지점에 이르기까지 자꾸만 뒤틀어지는 케빈과 에바 모자 관계가 광기로 치닫는 과정을 절제되게, 그러나 야성적으로 그려낸다.


이야기는 에바의 시점을 따라가기에, 그녀의 삶을 망쳐놓은 케빈이 사악하다고 느끼기 쉽다. 하지만 곱씹어보면 이 영화의 진짜 비극은, 끝내 이 괴물의 탄생을 누구의 탓으로 돌려야 할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아이의 출생은 여행가였던 에바의 삶의 동력인 자유를 앗아갔었고, 그렇기에 어쩌면 케빈은 애초에 사랑받을 수 없는 운명을 태어날 때부터 선고받았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케빈의 악마성은 결국 사랑받고자 하는 몸부림이었을까? 에바는 그런 케빈을 사랑하고 싶었지만, 결코 그 방법을 몰랐던 것일까? 영화의 디테일에 집중하다 보면, 여러 부분에서 케빈과 에바의 공통점이 계속해서 강조된다는 걸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결말부에 이르러, 에바는 성인 교도소로 이감되는 케빈을 찾아가 처음으로 “왜 그랬니?”라는 질문을 한다. 이미 파국을 맞은 모자 사이에 최초로 이어지는, 늦어도 너무나 늦은 소통의 단초다. 이 마지막 장면에서의 케빈의 대답을, 또 두 사람의 눈빛을 어떻게 읽을 것인지는 영화를 보는 당신에게 달려 있다.
마더
두 번째 영화는 프렌지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한국영화, <마더>다. 이미 세계적인 명감독이 된 봉준호 감독의 숨겨진 수작이자, 그의 가장 음침하면서 예술적인 면모를 아낌없이 보여주는 작품이다. 어머니와 아들을 다룬다는 점, 실체가 가려진 범죄 사건 하나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는 점에서 <케빈에 대하여>와 닮은 점이 많은 작품이기도 하다. 그러나 말 그대로 원수지간이었던 케빈과 에바와는 달리, 엄마 혜자(김혜자)와 아들 도준(원빈)의 관계에는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괴상함이 있다. 과보호, 집착, 또 묘한 성적 긴장감까지 서려 있는 기묘한 모성이다. 영화의 주요한 내용은 살인사건의 유력 용의자로 지목된, (지능이 많이 떨어져 보이는) 아들 도준의 누명을 벗기려 사투를 벌이는 엄마의 이야기다. 곳곳에 트리거(trigger, 불편하거나 자극적일 수 있는 소재) 요소가 깔려 있는, 분명 호불호가 갈릴 만한 독특함을 한껏 주장하는 영화지만, 그 특유의 기이하고 무속적인 분위기에는 부정 못 할 매력이 있다.


<케빈에 대하여>에 비해 <마더>는 좀 더 미스터리와 추리에 충실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가려진 진실을 밝히려고 하는 과정에서 비뚤어진 모성이 어떻게 폭주하는지를 관찰한다. ‘하나뿐인 내 아들’을 지키기 위해 엄마는 어디까지 악해질 수 있을까. 영화는 명실상부 대한민국의 ‘국민 엄마’ 김혜자를 통해 이 불편한 윤리적 질문을 붙들고 늘어진다. 엄마는 살인사건의 진실을 밝히려 공권력을 뿌리친 채 오직 자신만을 믿고 덤벼든다. 하지만 정작 마주치게 되는 것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혹은 믿고 싶지 않은 불편한 진실들뿐이다. 영화의 가장 소름 끼치는 장면은 어떤 살인 장면도 아닌, 그 진실이 수면 위로 떠 오르는 결정적인 두 개의 장면이다 (중반 면회 장소에서 한번, 후반 버스터미널에서 한번). 하지만 그 모든 진실을 뿌리치고도 결국 ‘엄마’이기를 택하는 혜자를, 우리는 엄마로 보아야 할까, 괴물로 보아야 할까. 이런 딜레마는 앞서 케빈에 대한 질문과도 겹쳐진다. 단지 사랑하고자 하는 행위(마더)와 사랑받고자 하는 행위(케빈)의 차이일 뿐.
<마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단연 오프닝과 엔딩이다. <케빈의 대하여> 오프닝의 이미지가 엔딩의 서사와 연결되며 맞춰지는 퍼즐 조각이라면, <마더>의 오프닝/엔딩은 수미상관을 통해 의미적으로 이야기를 포괄하는 괄호의 역할이다. 영화는 혜자가 밭에서 느닷없이 홀로 춤을 추는 장면으로 시작해, 고속버스 속에서 수많은 아주머니들 사이에 섞여 춤을 추는 장면으로 끝난다. 안정적인 카메라와 넓은 앵글로 촬영한 오프닝 씬과, 측면 역광에서 혼란스러운 카메라로 촬영한 엔딩 씬. 똑같은 춤으로 전혀 다른 맥락을 빚어내는 표현력은 감탄을 자아낸다. 흔들리는 카메라 너머로 혜자와 버스 속 아주머니들을 구분할 수 없게 된 순간, 혜자 한 사람의 이야기는 모든 ‘마더’들의 이야기들로 확대된다. 가족 속에 있는 이상 우리는 모두 에바일 수도, 혜자일 수도, 케빈일 수도, 도준일 수도 있다.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가장 밑바닥의 내밀한 섬뜩함을 자아내는 이유다.


- 서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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