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에 도전한 한 인간, 프랑켄슈타인: 뮤지컬 프랑켄슈타인 리뷰
- Frenzi
- Jul 31, 2018
- 4 min read
*본 리뷰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마리 쉘리의 <프랑켄슈타인>은 수많은 2차 창작을 양산한 영문학에 있어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그중에서도 국내 창작 뮤지컬 <프랑켄슈타인>은 창조주인 빅터 프랑켄슈타인과 이름 없는 괴물의 관계를 강화했다는 점에서 눈에 띄는 작품이다. 원작은 생명을 창조하고 싶다는 프랑켄슈타인의 오만함과 호기심에서 기인한 비극이지만, 뮤지컬에서는 동기가 사랑과 오만함 모두가 되며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인간의 모습에 또 다른 면을 추가한다.
우선 뮤지컬은 원작에서 충격에 빠진 프랑켄슈타인을 위로하는 역할 정도에 그치던 친구 앙리를 주연으로 끌어올린다. 생명 창조에 대한 열정을 가진 프랑켄슈타인과 그를 유일하게 이해해주는 앙리 뒤프레는 누구보다 친한 친구가 되며, 자신을 대신해 누명을 쓰고 죽은 친구 앙리를 되살리려는 프랑켄슈타인의 노력은 괴물이라는 결과로 나타난다. 그렇기에 3시간이라는 러닝타임 안에 원작의 긴 서사가 압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북극에서 만난 빅터와 괴물 사이의 심리적인 긴장감이 팽팽하게 다가온다.

더 나아가 빅터가 처음 생명을 창조하고자 하는 이유를 원작과 달리 어머니의 죽음과 관련지어 원작과 차이를 둔다. 빅터가 앙리를 설득하는 넘버 “단 하나의 미래”의 “강요당한 도덕 따윈 잠시 버리고”라는 가사가 다가오는 점이다. 빅터는 다른 아이들과 다른 바 없이 엄마를 사랑하고, 되돌리고 싶었을 뿐이다. 다만 시체를 훼손하면 안 된다, 죽은 것은 되살릴 수 없다 등의 “강요당한 도덕”이 없었다. 그것이 무관심 속에서 자란 아이의 교육 탓인지, 정말 빅터가 원래부터 다른 이들과 다른, 제네바 시민들이 말하는 “이상한 아이” 내지는 “마녀의 아들”이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중요한 것은 빅터는 그 결과 더욱 사람들에게 배척당하고, 더더욱 자신의 연구에 매달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빅터의 동기는 오만함이기도 하다. 첫 다짐은 사랑이었을지 모르나 어릴 적의 다짐이 마침내 성공까지 이어진 것에는 그의 오만함과 집착이 작용했을 것이다. 이는 바르고 누구보다 도덕적인 인물인 앙리를 생명 창조라는 그의 모험에 함께하도록 설득한 것은 빅터의 어릴 적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에서 알 수 있다. 앙리가 빅터를 대신해 누명을 쓰며 부르는 넘버 “너의 꿈속에”의 가사를 보자.
꿈꾸는 너의 두 눈동자에 난 눈을 뗄 수가 없어
강렬하게 사로잡혀 너의 생각 너의 신념 너의 의지 그 속에 넌 이제껏 나 살았던 순간들 모든 걸 다 의심했던 순간 태양처럼 다가올 널 보며 그동안 난 얼마나 초라한지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신념과 의지로 꽁꽁 뭉친, 자신이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고 믿는 인물인 것이다.
<프랑켄슈타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꼭 나오는 이야기 중 하나는 바로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인간에 대한 경고이다. 하지만 뮤지컬 <프랑켄슈타인> 속 프랑켄슈타인은 신의 영역에 도전하겠다는 오만함은 보이지 않는다. “대위님은 신을 믿지 않습니까?”라는 앙리의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 “믿어. 하지만 그것은 축복의 형태가 아닌 저주의 형태로지”는 신에 대한 도전이라기 보다는 그저 한 인간으로서 신의 말씀이나 도덕의 방해를 받지 않고 그 자신이 원하는 것을 완성하고 말겠다는 오만함이 그를 움직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어떻게 보면 프랑켄슈타인은 누구보다 강렬한 신앙심을 가진 사람이다. 다만 그가 믿는 것은 신이 아닌 그 자신과 과학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앙리로서의 기억은 모두 없어진 괴물은 빅터 프랑켄슈타인을 “신에 도전한 남자”라고 칭한다. 신과 도덕을 믿던 앙리의 모습과 괴물이 겹쳐 보이는 부분. 피조물인 괴물의 입장에서는 빅터가 창조주이기에, 또한 빅터에 대한 사회적인 시선은 어쩔 수 없기에 들어간 가사가 아닐까 생각된다.
물론 이것이 괴물이 신을 믿는다는 뜻은 아니다. 괴물은 다만 눈을 뜨자마자 창조주에게 버림받은 기억, 그리고 이후의 괴로운 생 때문에 창조주에 대한 증오를 길렀다. 주변 사람들이 그를 부추긴 탓도 있다. 처음 눈을 뜬 괴물을 빅터는 앙리라고 부르며 살뜰하게 챙겼으니 말이다. 빅터가 괴물을 배척한 것은 그가 빅터의 집사 룽게를 죽이면서부터이니 빅터 입장에서는 억울할 만도 하다 (이 역시 원작과 크게 대비되는 부분). 그러나 괴물의 원망에 끝은 조금 더 깊이 있다. 이렇게 내던질 것이면, 이렇게 고통받게 할 것이면 대체 왜 자신을 태어나게 했는가? 괴물의 입장에서 빅터는 도전을 하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지 못한 사람에 불과하다. 괴물이 도망칠 때 입고 있던 빅터의 옷 주머니에서 나온 실험일지에 생명 창조라는 실험 목표만 나와 있으니 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니 괴물에게 있어 빅터는 신에 도전한, 그러나 그 자신의 오만함에 결국 실패하고 만 사람인 것이다. 실험의 목표는 생명 창조였으나 창조의 목표는 앙리를 살리는 것이었다는 걸 알지 못한 채 말이다.

그리고 이런 괴물의 입장과 빅터의 입장을 모두 알고 있는 관객의 시선에서는 그저 마음 아플 뿐이다. <프랑켄슈타인>이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도 바로 이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빅터는 오만함과 신념을 동시에 가진 인물이었지만 결국은 그도 인간이었기에 모든 행동의 결정적인 동기는 사랑이었다. 그러나 그 방식이 도덕과 신앙을 통한 것이 아니었기에 결과는 그에게 비극이 되어 돌아온다. 반면에 빅터의 신념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한 앙리는 그 신념의 결과물이 되어 빅터를 원망하며 돌아온다. 그는 신념과 과학의 결과물이지만 누구보다 인간적이다. 빅터를 향한 복수를 다짐하는 넘버 “나는 괴물”의 가사를 보면 알 수 있다.
어젯밤 처음 난 꿈을 꾸었네 누군가 날 안아주는 꿈 포근한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잠드네 나 그 꿈속에 살 순 없었나
괴물이 원했던 것은 그저 외롭지 않은 것,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는 것이었다. 이처럼 원작이 던지는 생명 창조에 대한 문제 제기와 원작과 뮤지컬 모두에서 드러나는 빅터의 오만함, 그리고 괴물의 인간에 대한 갈구에 빅터라는 인물의 인간적인 면이 더해져 프랑켄슈타인은 더욱 다층적이고 복잡한 인물이 된다. 이 뮤지컬의 결말이 흥미로운 이유이다.

뮤지컬은 원작과 달리 프랑켄슈타인과 괴물이 북극에서 만나 싸우다 프랑켄슈타인이 괴물을 죽이며 끝난다. 그러나 이것은 프랑켄슈타인의 승리가 아니다. 그도 다리에 상처를 입어 혼자의 힘으로 북극을 벗어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에 프랑켄슈타인의 반응이 흥미롭다. 그는 쓰러진 괴물을 바라보며 친구 앙리의 이름을 부르다 마지막 넘버 “나는 프랑켄슈타인”을 부른다. 가사를 보자:
차라리 내게 저주를 퍼부어라 신과 맞서 싸운 나는 나는 프랑켄슈타인
그는 괴물을 보며 친구로 생각해 앙리라 불렀지만, 그는 종래에 자신을 신과 맞선 사람으로 정의했다.
필자가 관람한 공연에서는 특히 당일 배우들이 원래 없는 디테일을 추가해 더 흥미로웠다. 괴물은 숨이 끊기기 직전 빅터를 “나의 친구”라고 부르며 “이것이 나의 복수야”라는 마지막 말과 함께 죽고, 빅터는 마지막 “프랑켄슈타인”이라는 가사를 부르기 전 흐느끼며 괴물을 안고 “나의 친구”라고 말을 한 것. 빅터의 두 가지 동기 사랑과 오만함 모두가 복합적으로 드러나는 마지막 장면이었다.
뮤지컬은 대중매체에서 괴물의 모습이 부각된 것과 달리 프랑켄슈타인에 더 집중하는 것 같다. 그는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한 인간이기도 하고, 동시에 신에 도전하고 자신에 대한 신념을 가진 오만한 자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모두를 한번에 설명할 수 있는 말은 바로 “프랑켄슈타인”인 것이다.
- 스텔라

<공연 정보>
제목: 프랑켄슈타인
출연: 류정한, 전동석, 민우혁, 박은태, 한지상, 카이, 박민성, 박혜나, 서지영, 안시하, 이지혜 등
기간: 2018.06.20 ~ 2018.08.26
장소: 블루스퀘어 인터파크홀
사진 출처: 뮤지컬 프랑켄슈타인 공식 트위터, 블루스퀘어 공식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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